
최근 개봉한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보고 나오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정말 그 소설 맞나?"였습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원작을 읽어 본 분들이라면 아마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셨을 겁니다. 에메랄드 페넬 감독이 제목에 인용부호를 붙인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원작의 '재해석'을 넘어 거의 새로운 이야기에 가까웠으니까요.
## 원작과 달라진 서사 구조와 인물 설정
영화는 원작의 액자식 구성(frame narrative)을 완전히 해체했습니다. 여기서 액자식 구성이란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는 형식으로, 원작에서는 넬리가 손님 록우드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중심의 직선적 서사로 바꿔 버렸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힌들리 언쇼라는 핵심 인물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원작에서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학대하고 몰락하는 인물로, 히스클리프의 복수극을 촉발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영화에서는 그의 역할을 아버지 언쇼가 대신하면서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가 왜 복수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 심리적 배경이 원작보다 훨씬 약하게 느껴졌거든요.
린튼 가문의 비중 역시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원작에서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은 마을의 양대 부유한 집안으로 설정되는데, 영화는 언쇼 가문을 허름하고 궁핍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에드거의 부친이나 2세대 인물들이 모두 삭제되면서 린튼 가문은 에드거와 이사벨라 두 명만 등장합니다. 이런 변화는 계급 갈등(class conflict)이라는 원작의 핵심 주제를 상당히 희석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의 외형과 성격도 원작과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 캐서린: 원작의 거칠고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 순화되었고, 갈색 머리에서 금발 푸른 눈으로 변경되었습니다
- 히스클리프: 집시 같은 까무잡잡한 피부색에서 평범한 백인으로 바뀌었습니다
- 에드거와 이사벨라: 금발 푸른 눈에서 갈색 머리로 변경되었습니다
- 이사벨라: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조되며 BDSM 관계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인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 불륜 중심으로 재구성된 이야기와 논란
영화의 가장 큰 변화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를 노골적인 불륜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입니다. 원작에서 캐서린은 "나는 히스클리프다"라는 유명한 대사로 영혼의 동질성을 표현하지만, 실제로 육체적 불륜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에드거와의 결혼 생활에 충실해지려 하고, 죽기 직전에야 히스클리프를 다시 만납니다.
하지만 영화 속 캐서린은 에드거와의 관계에 권태를 느끼고 히스클리프와의 불륜을 즐기면서도 죄책감에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가장 큰 불편함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원작이 지닌 초월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개념이 현대적 불륜 서사로 평면화되어 버린 느낌이었거든요.
영화는 복수극으로서의 성격도 크게 약화했습니다. 히스클리프가 차별받고 학대당하는 묘사가 축소되면서, 그가 왜 복수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또한 2세대 이야기가 완전히 삭제되면서 원작의 순환 구조와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 원작은 히스클리프의 죽음과 2세대(캐서린 2세와 헤어턴)의 결합으로 끝나며 희망을 제시하지만, 영화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됩니다.
35mm 필름 비스타비전(VistaVision) 촬영 기법을 사용한 영상미는 분명 뛰어났습니다. 여기서 비스타비전이란 필름을 수평으로 움직여 더 넓은 화면을 담아내는 촬영 방식으로, 거친 들판의 풍경을 압도적으로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영화를 보면서 자연환경과 분위기만큼은 원작의 어두운 톤을 잘 살렸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논란은 캐스팅에서 발생했습니다. 제이콥 엘로디가 히스클리프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화이트워싱(whitewashing)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화이트워싱이란 원작에서 유색인종인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인종적 다양성을 해치는 문제가 있는 관행으로 지적받아 왔습니다([출처: 영국영화협회](https://www.bfi.org.uk)).
원작 소설에서 히스클리프는 리버풀에서 데려온 고아로, 검은 피부와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며 주변인들로부터 "집시"라고 불립니다. 그의 불분명한 인종적 배경은 19세기 영국 사회의 인종 및 계급 편견을 보여주는 핵심 요소입니다. 백인 배우가 이 역할을 맡으면서 원작의 사회비판적 메시지가 약화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캐스팅 담당자 카멜 코크린은 "인종적 편견을 배제한 캐스팅을 선호한다"라며 "작품을 직접 보고 판단해 달라"고 밝혔지만, 이는 원작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간과한 처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출처: The Guardian](https://www.theguardian.com)).
솔직히 저는 영화를 보면서 감정적으로는 몰입했지만, 원작 팬으로서는 내내 혼란스러웠습니다. 뛰어난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는 인정할 만했지만, "이게 과연 폭풍의 언덕인가"라는 의문은 끝까지 남았습니다. 에메랄드 페넬 감독이 제목에 인용부호를 붙인 것처럼, 이 영화는 원작의 '또 다른 버전'이라기보다는 원작을 소재로 한 전혀 다른 작품에 가깝습니다. 원작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각오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반면 원작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강렬한 멜로드라마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